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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기행> 강릉 괘방산에서의 긴 생각

‘산방’에 와서 첫 번 째 참가하는 원정산행입니다. 첫 번째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각별합니다. 더우기 남자에게 첫 번째라는 의미는 세상살이 나이테가 많아지고 커질수록 한층 더 진하게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나이 들어가면서는 특별한 인연을 만들지 말라는 것인가 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놓아야 할 때 오히려 번뇌가 생기고 또 깊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강원도 강릉까지는 꽤 먼 여정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멀수록, 오래 걸릴수록 좋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행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괴테는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데에 이의가 없습니다.

그 소설에서의 동쪽은 비극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신뢰가 무너진 참담한 가족 갈등, 비위 맞추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고집스런 편애와, 철저히 소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또 한 아들의 속 깊은 노력과 좌절을 감정이입하면서, 안타까운 원망과 분노를 끓이며 읽고 보았던 그 소설과 영화의 스토리는 내 젊은 가슴을 할퀴며 오랫동안 뇌리에 각인 됐었습니다. 에덴동산의 동쪽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이 질투심에 불타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죄로 이마에 낙인을 찍힌채 추방되어 간 방향이었습니다. 작가는 그 뒤틀린 비극적 가족 얘기소재를 카인이 추방되어간 곳, 에덴 낙원의 동쪽으로 상징화 했던 것 같습니다. 방향에 대한 은유는 양의 동서가 서로 다른가봅니다.

산행 끝 뒤풀이가 이어집니다. 뒤풀이 자리에서의 품위 유지 한계선은 매우 위태로운 줄타기 곡예입니다. 삐익~ 삐익~ 적색경보가 수시로 울립니다. 음주는 적당히 피하는 게 상책이고 입에는 스스로 지퍼를 채우는 게 현명합니다. 술자리에서의 말과 행동을 술자리만의 이벤트나 에피소드라고 치부하고, 뒤돌아 나올 때 즉시 잊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부터 두고두고 그에 관한 스토리가 마치 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한 탐험가의 영웅적 보고서처럼 가공되고 각색되어 중단 없이 흘러 다닙니다. 적색경보가 발령된 술 취할 수 없는 술자리는 전기고문입니다. 그리고 그 술은 독약과 같아서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과 인간관계의 건전성도 해칩니다.

다시 귀경버스에 오릅니다. 버스 안은 쉬면서 오기에 적절한 평화가 흐릅니다. 그런데 아프간 젊은이는 한국의 예법과 한국인의 유교적 예절에 완전 백지인가 봅니다. 하산길에 많은 얘기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슬쩍 화가 나려 할 때 드디어 까칠한 산소가 일어나 버스 뒷좌석 그가 떠드는 곳으로 갑니다. 안봐도 결과는 뻔합니다. 호된 표정으로 나무랐겠죠.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늦은 일정에 모두 서두르는 기색입니다. 군자역 입구 길거리 복판에서 호방하게 구호를 외칩니다. “행복 산해앵 ~”

또 한 번 ‘오늘’을 이별합니다. 이 지구별 여행길에서 매 순간 겪어 온 또 한 번의 작은이별과 오늘도 진지하게 마주합니다. 안녕 ….. 그리고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합니다. 이미 저만치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긴 이별, 온전히 혼자서만 맞이할 수 있는 판타지, 이 지구별 인연들과의 의미 깊은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러나 이별이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그것은 단지 <마음의 흐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그대는 사는 법을 배우게 되리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붙어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여기 ‘지구 별 역’에서 ‘다음 별’로 가는 열차로 환승하는 것 이라고!

군자역 5번 출구에 제시간에 도착합니다. 많은 분들이 와 계십니다. 조금 늦게 산소가 도착하고, 노라님이 도착합니다. ‘아이참, 나 화장해야 하는데 어떡해~’ 예의 그 하이톤 음색으로 피곤한듯한 얼굴을 가리며 노라님이 말해 주변을 미소짓게 합니다. 모처럼 바우 아우님도 왔습니다. 오늘 하루 함께 여행길에서 지낼 반가운 일행들입니다. 불교의 인연법에 의하면, 누군가와 여행길에 동행할 경우 그 사람과는 3천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은하계가 생겼다가 소멸하기를 3천 번 반복하는 시간동안 쌓여진 인연입니다. 비록 가벼운 스침이라 해도 사람과의 만남은 그렇게도 질긴 인연의 근원과 닿아 있음에 온 몸의 솜털이 일어섭니다.

타고갈 버스가 도착하고 일행은 모두 버스에 오릅니다. 좌석 배치도가 있습니다. 운영진의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이것 저것 챙겨 준비를 끝내준 총무님이 돌아갑니다. 집안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마음이 썰렁해 집니다. 그 임무를 귀비님과 나르샤님이 짊어 집니다.

운영진들은 준비에 집중하고, 일행들은 기대에 집중합니다. 출발 전의 버스 안에는 모험 본능적 도전심의 상승기류와 생존 본능적 미지불안의 하강기류가 뒤섞여 떠다닙니다. 어딘가로 떠나려 할 때 사람들은 앞에 놓인 예측불가능성으로 인해 조금 다변해지기도 하고 그 표현 또한 조금 과장되기도 합니다. 알코올의 작용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는 서로의 감정과 느낌을 조금 오버하여 내보인다 해서 그게 꼭 흉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는 우리 삶의 노트에서 넉넉하고 너그러운 똘레랑스의 여백이 있는 한 페이지이기 때문입니다.

청량한 오월 초의 아침입니다. 연초록 블라우스 차림의 가로수들이 호들갑을 지운 오똑한 자태로 버스를 배웅 합니다. 꼼지락거리며 살아가던 우리 삶의 둥지, 입하가 지난 초여름 도심의 아침을 뒤에 남겨두고 오늘 하루 머물 이 땅의 동쪽, 해 뜨는 쪽 바닷가를 향해 출발합니다.

버스 안에서 간단한 아침 요기를 합니다. 김밥입니다. 한국인의 영원한 아웃도어 음식입니다. 후각을 일깨우는 김밥의 냄새는 내가 곧 한국인의 DNA이고, 죽어서 이 산하 어딘가의 바람 속에, 흙 속에 뿌려져 섞일 것이라는 자각을 확고하게 해 줍니다.

버스는 연휴 주말의 고속도로 위를 달려갑니다. 내 젊음은 나를 쉼 없이 떠 밀쳐 내며 유수같이 바람같이 흘러 천천히 훼이드 아웃(fade out) 하였습니다. 그렇듯이 이별의 손수건을 흔들며 내 곁에서 저만큼 봄 처녀는 떠나가며 치마꼬리만 살짝 보일뿐입니다. 그녀와의 작별을 명철한 의식으로 또렷이 직면하기 위해 나는 지금 동쪽 바닷가로 갑니다. 그리고 대신 풋풋하고 싱그러운 체취를 온 몸으로 너울대며 저만치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계절의 여왕 초여름에게 입 맞추기 위해 나는 지금 바다 곁의 그 산으로 갑니다.

나이는 유령입니다. 과거라는 유령일 뿐입니다. 그 유령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생이란 시간의 흐름에 불과한 육체적 나이와 전혀 관계없이 밝고 환한 영혼의 설레임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뒤돌아보는 지점이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를 지향하는 무한궤도의 도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구해 준 책을 뒤적거리다 거의 밤을 밝히고 출발 했지만, 나는 버스 안에서도 잠들지 못합니다. 차창 밖에서는 마치 버스라는 주축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전달 톱니바퀴처럼, 회전목마 놀이터의 널찍한 원형 받침처럼, 버스의 움직임에 연동되어 천천히 회전하며 뒤로 멀어져가는 산야의 풍경이 나를 계속 깨어 있게 합니다.

바다가 보입니다. 어느덧 우리가 오를 산 밑에 도착했습니다.

산 이름은 그 유래가 썩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인근 고을 누군가가 과거에 급제를 하게 되면 두루마기에다 그의 이름을 쓴 “방”을 이 산에 내걸어(괘) 귀신과 사람들에게 알렸다는 유래랍니다. 생각해보면 암기능력만을 활용해 무슨 무슨 고시라는 것에 합격했다하여 갖추어야 할 다른 능력과는 무관하게 관직을 꿰차거나, 거짓말과 사술이 뛰어나 무슨 무슨 선거에 당선되었다 하여 갖추어야 할 덕목과는 관계없이 권력을 움켜쥐면 그것을 가문의 자랑이라 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그것들은 아직도 한국에서는는 민중을 향해 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봉건 왕조적 신분상승의 장대높이뛰기이고, 민초들이 땀 흘려 벌어 납부한 세금을 끼리끼리 합세하여 영리하게 뜯어먹는 부정축재의 왕도임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한국은 자유, 정의, 진리가 존중되는 제대로 된 자유민주국가가 못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야 그렇다 치지만, 우리 후손들이 걱정입니다. 선진국에서 한국을 손가락질하며 아직 ‘국가’가 못되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쑤근거리는 근거입니다.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아담한 언덕 같은 정겨운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걸어갑니다. 어제의 비바람에 바람이 모두 소진된 듯 나뭇잎조차 고요합니다. 맑은 오월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밝은 태양빛은 숲속 오솔길에 서 있는 내 머리 위 나뭇잎들을 비춰 마치 반투명 연초록색의 대형 연등 터널 속에 들어가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합니다. 왼쪽으로는 동해바다 해안선이 앞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내가 한국지도 맨 오른 쪽 길고 긴 동해바다 한 곳 해변을 따라 걷고 있는 것입니다 !!! 꽃들이 진 자리에 아롱아롱 열매가 잉태되고, 새로 나온 초록 잎들이 거침없이 새 가지를 키워가는 산길을 걸으며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진 푸른 비닐을 펼쳐 놓은 듯 잔잔한 마린블루 색 동해바다에 취합니다. 아~ 영탄이 나올 뿐입니다.

볼 때마다 바다는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단순미, 간결미의 극치입니다.

미학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원리는 단순화(simplification)입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깃든 여백공포의 증거라는 꾸밈(ornamentation)은 찰나의 시간도 못돼서 오히려 추해집니다. 꾸밀수록 오히려 더욱 추해집니다. 시각적 대상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의식을 포함한 추상적 개념까지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단순미, 간결미의 바다는 인간에게 영원한 아름다움의 고향입니다.

멀리 보이는 해변에는 파스텔 톤 복합베이지색의 모래해변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능선의 실루엣 너머로 보이는 먼 수평선은 마치 김이 서린듯한 하늘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다 너머 그 위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우주 공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기가 막히는 계층 구조적 조화미 앞에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와 문자는 모두 부숴져 내립니다. 어떻게 그것으로 이 오묘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대동강 부벽루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그 풍광의 아름다움을 시로 적어내려 하였으나 끝내 표현할 시구를 떠올리지 못해 붓을 던지고 슬피 슬피 통곡하고 말았다는 고려 문인 김황원, 그리고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며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해 버린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천학과문(淺學寡聞)하나마, 그 두 사람의 정직한 문인다운, 참으로 맑은 절망을 유추해 봅니다. 인간은 어떤 감정과 느낌이 지극할 때, 외마디 소리를 삼키는 외에는 눈을 뜨고 있으되 장님이 됩니다. 말도 막히고, 숨도, 움직임도 멎습니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어떤 감정이나 느낌으로 인해 모든 것이 정지될 그 순간의 그 감정만이 오직 지극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표현은 배우 같은 연기(演技)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연기로 속이고, 그 연기에 속으며 삽니다.

오늘 나는 여기 괘방산에서, <존재하나, 형언할 수 없는 대상>앞에서 오로지 통곡으로 밖에 묘사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고려 문인 김황원의 순수했던 절망과, 목숨의 헌상으로 밖에 찬미할 다른 길이 없었던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지극했던 절망도 함께 넘겨다봅니다.

오르막 산길에서, 태어나 처음 등산을 해 본다는 북경댁 쉬엔이 힘겨워 합니다. 동행하는 여성 회원들의 위로와 독려로 다시 힘겹게 오릅니다. 나르샤님의 경험담에 따르면 그것이 초심자가 겪는 ‘산멀미’라고 합니다. 중간 쉼터에 왔을 때 쉬엔이 배낭에서 오이, 방울토마토를 꺼내 일행에게 대접합니다. 아니, 저 무거운 접대용 음식이 처음 오르막 산길을 경험하는 그분의 배낭에 들어 있었다니.., 그러니 그리도 힘들었을 겁니다.

왁자한 점심시간입니다. 어깨는 가볍게, 뱃속은 넉넉하게 짐을 옮겨 담을 기회입니다. 먹는 자리는 맘 편한 게 제일입니다. 내 친구 산소는 오늘도 일행을 공양하기 위해 물을 끓입니다. 호암은 마눌님의 음식 솜씨를 보라는 듯 여유있게 천천히 음식꾸러미를 풀어 놓습니다. 부러운 여유입니다. 약수는 오늘 오지랖 넓은 마눌님이 싸주는 넉넉한 먹거리를 안가져 왔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초청문자를 보내면서 점심도 제공한다하여 그냥 왔답니다.

운영진들의 배낭은 ‘먹일 것’ 배낭이고, 일행들의 배낭은 ‘나눌 것’ 배낭이지만, 내 배낭은 변함없이 ‘나 먹을 것’뿐인 배낭입니다. 매번 면구스럽습니다. 가족이 각자의 취미를 공감해 준다는 것은 이래서 중요합니다. 오늘의 점심은 짭조롬한 바다내음이 섞여진 때문인지 유난히 더 맛있습니다.

하산 길에서도 쉬엔은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가만 보니 참가 두 번 만에 이미 독립 국가를 세웠습니다. 곧 UN에도 가입할 태세입니다. 역시 대륙 여인의 스케일입니다.

오후의 따뜻한 햇볕은 오솔길에 흙먼지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일행들의 걸음에 먼지가 솔솔 일어납니다.

산 밑에 내려와 바닷가에 도착했습니다. 정 동쪽을 향해 서서 바다를 바라봅니다. 오행에서 일컫는 동쪽은 희망이며, 색으로는 오방색의 청색입니다. 청색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색,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색입니다. 다른 의미의 동쪽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숙제도 포기하면서 며칠 밤을 불 밝히고 읽었던 소설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 존 스타인벡의 또 다른 소설, ‘에덴의 동쪽’. 20대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할 당시 반항아의 상징이었던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로도 원작만큼 주목 받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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