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충남 홍성에 있는 용봉산에 가는 날입니다. 홍성은 긴 말이 필요 없는 자타가 공인하는 충절의 고장입니다. 또한 많은 예술인을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6월 초 토요일 아침의 서울은, 하늘 흐린 가을 운동회 때 운동장에 쳐 놓은 천막 속 같습니다. 하늘에 펼쳐진 중채도의 회색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손에 잡힐 것 같습니다. 일찍 와서 기다린 버스에 올라 있는 일행들의 분위기도 회색입니다. 롯데 월드 빌딩 앞을 지나 올 때는 차창 밖으로 올려다 보이는 그 높은 빌딩이 마치 천막 같은 회색 하늘 중심을 떠받치고 있는 중심 받침대 같아 보였습니다.
버스는 현충일 연휴의 숨막히는 고속도로에서 거북이걸음을 합니다. 김밥의 익숙하고 친근한 냄새가 버스 안을 휘감고 난 뒤, 일행들은 잠시 의자 등에 기대어 새벽 이른 기상의 후유증을 달랩니다. 막힌 고속도로가 지루하고 나른합니다.
초여름 아침, 기대에 부푼 소풍길에서의 지루함과 무료함이라니 !
오늘 이 버스 안에서 혼자 듣는 스마트 폰 앱의 유투브는 그런 내 욕망의 해결사입니다. 밤꽃이 피는 요즘 무렵이나, 철 지난 여름 끝 9월 무렵 황혼녘에는 모짜르트의 호른 협주곡, 특히 3번이 환상적으로 마음을 붙잡아 줍니다. 호른(Horn)은 달팽이를 닮은 귀족적인 형태의 금관악기지만, 부드러운 중저음 음색이 오늘 같은 회색의 묵직한 분위기와 기막히게 매칭 됩니다. 그런 계절의 심리적 감촉과 오늘 같이 회색 하늘이 낮게 드리워진 날씨와는 정서상 이형동질입니다. .
그러나 태양의 열기가 이글거리는 저습도의 한여름에는 목관악기 클라리넷의 음색이 최적입니다. 영화 <아웃 어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에서 여주인공 카렌(메릴 스트립)이,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로부터 결혼을 거절당한 후. 아프리카를 떠나기로 한 자신을 배웅해 준다던 데니스를 기다리던 중에 결국 그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요. 그의 영혼이 깃든 아프리카를 끝내 떠나지 못한채 카렌이 그리도 자유분방했던 데니스를 그리며, 건물 밖에 의자를 내놓고 석양의 아프리카 사반나 초원을 바라보며 사랑했던 그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감독 시드니 폴락이 선택한 음악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선곡이지요. 나는 칼 뵘이 지휘하던 시절 녹음된 베를린 필의 연주 녹음을 퍽 좋아합니다.
차창에 드문드문 부딪치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느지막이 도착한 산 아래 주차장에서 바라보니 용봉산은 그저 시골 읍내 뒷산 같은 규모로 보입니다. 산 이름 자체의 상징성만큼은 충절의 고장에 있는 산 이름으로서 나무랄 데는 없다는 생각이지만, 그렇더라도 소문이 좀 과장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에, 후드득거리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기 위해 부산하게 우의를 챙기는 마음이 더욱 심란합니다.
들머리에서 얼마 오르지 않아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로 가득한 바위 능선들과 만납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크지 않은 산인데 막상 들어와 보니 산의 바닥 면적이 넓은 듯, 바위덩어리로 구성된 산의 속내가 웅장합니다. 의외입니다. 더구나 갖가지 형상의 기암 괴석마다에는 약간 억지스럽기는 하나 각각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물개바위, 용바위, 솟대바위, 병풍바위, 의자바위, 공룡바위….참 아름답고 아기자기 합니다.
언젠가 우연히 수석과 분재를 소개한 전시회의 도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실물 경관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미니어쳐 같은 수석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면서 마치 내가 걸리버 여행기의 대인국 사람이 된듯한 생각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반대의 생각에 빠집니다. 마치 내가 소인이 되어 어느 대인국 사람이 꾸며 놓은 아기자기한 정원이나 아니면 그들의 수석 화분 속에 들어와 있다는 환각이 들었습니다.
간헐적으로 추근거리는 빗방울을 무시하며 전망대에 모두 모여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산행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마치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무심히 바라봤던 이 산의 속내가 이리도 다이나믹하고 현란할줄은 미쳐 예상치 못했습니다. 꾸미거나, 과장하거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면으로 응축된 깊은 지성을 갖춘 겸손한 현자를 만났을 때 오는 경외감 같은 느낌입니다. 드문드문 갈색 검버섯이 핀 적자주색 겉껍질이 약간 지저분해 보이는 페르시아 석류를 쪼갰을 때, 의표를 찌르듯 그 속에서 나타나는 보석 같이 영롱한 투명하고 밝은 마젠타(magenta) 색 석류 알을 바라볼 때 오는 경탄 같은 느낌입니다.
투석봉을 앞두고 오늘의 산행리더 바우님이 프랑스식 R 발음에 흡사한 약간 구부린 류음의 어조로 용봉산에 돌무더기가 쌓인 내력을 설명합니다. 얘기인 즉, 두 남성의 한 여인에 대한 짝사랑과 연정이 원인이랍니다.
글쎄요, 그들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말 그대로 두 남자가 멀리서 경쟁심을 바탕으로 짝사랑들을 했다면, 그것도 투석전을 벌일정도의 동물적 사랑을 일방적으로했다면 아마도 비극적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한 곳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야만적 사랑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배 형으로부터 소설 한권을 빌려 봤었습니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였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가정부로 취직한 집 아들 알렉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채 사생아를 낳아 죽음으로 이별하고 그 집을 떠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테스의 비극은 그 후, 목사의 아들 클레어와의 마지못한 사랑으로 이어졌고, 순진한 테스가 어두운 과거 일체를 고백한 것이 또다시 비극의 원인이 되어 결국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는 클레어의 곁을 말없이 떠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테스의 가혹한 운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서 알렉이라는 사내가 다시 나타나 못이기는 척 테스는 그와 가깝게 되나, 바로 그때 다시금 나타난 것이 클레어였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뒤늦게 다시금 테스를 맞이하러 온 것이었죠.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괴로운 모습으로 말하며 클레어를 떠나보냈으나, 테스는 결국 알렉을 찔러 죽이고 클레어의 뒤를 쫓아갑니다. 그러나 클레어를 만났을 때, 그녀를 추격해 온 경찰관들도 그녀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따라 나서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뒤따라온 테스를 위해 클레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자신의 앞에서 지쳐 쓰러진 테스를 안고 경관에게 부탁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눈 뜨게 될 동안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감옥 지붕 위에 테스의 죽음을 알리는 검정 깃발이 펄럭펄럭 나부낄 때, 그 깃발이 나부끼는 형무소를 바라보면서 슬픔에 잠겨 있는 두 남녀를 조명하며 소설은 휘날레를 고합니다. 하나는 클레어였고, 다른 하나는 테스가 그에게 부탁한 그녀의 동생 리자루였습니다.
그 때 나는 테스를 읽으며, 내가 소설 속 남자들과 동성이라는 것이 정말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때의 소설들은 항상 가해자로서 남자만을 내세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나의 자격지심과 죄책감은 대학 때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많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연옥편 8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결과 감촉이 끊임없이 불붙지 않는 한, 계집에 있어 사랑의 불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함을 저 여인을 두고 아주 쉽게 알 수 있으리라.>
하산 길에 작은 규모의 용도사라는 사찰에도 들릅니다. 불교의 내세관을 상징하는 소박한 형상의 미륵불이 서있습니다. 경내 스피커에서는 금강경 독경이 흘러나옵니다.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 고독원…” 우주에는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공(空) 사상을 설파한 경입니다. 2500년 전에 붓다는 오늘날 양자물리학에서 겨우 알아내기 시작한 “우주는 모든 것이 조밀한 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 설파한 것입니다.
산행 뒤풀이를 위해 바우님이 나름대로 안팎이 잘 가꾸어진 식당으로 일행을 안내합니다, 객을 위한 주인의 심성이 곳곳에서 세심하게 묻어나는 곳입니다. 음식도 맛있고 깔끔합니다. 주인 내외의 언행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50대 초반쯤의 나이에 경박하지 않으면서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과장된 친절도, 무표정한 불친절도 아닌 수즙은 듯 조신한 처신들입니다. 안주인은 말씨도 자분자분합니다. 음식에는 만든이의 마음이 배어 맛으로 드러나는 법인데, 이 집의 음식이 맛있는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여느 식당답지 않게 안주인이 직접 따라주는 핸드드립 커피잔은 마당의 잔디밭 벤치에 앉아 잠시나마 식후의 여유를 음미한 동기입니다.
귀경길 고속도로 휴게소 마당이 웬일인지 한산합니다. 오늘의 산행 리더 바우님이 서쪽하늘에 비로소 드러나는 낙조를 배경으로 역광 사진을 촬영하며 산행 내내 풀어 놓던 마지막 개그를 날립니다. 오늘의 산행에서 1인 3역을 해낸 장한 리더입니다.
오늘은 버스 안에서의 자기 소개로 시작하여 버스 안에서의 작별인사로 끝내는 날인가 봅니다. 하차 후 늘 하던 호기로운 구호제창 없이, 제대로 갖춘 인사조차 없이 각자의 길로 흩어져 갑니다. 만남보다 헤어짐이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세기말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에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있지요. 주인공 도리언이 유미적(唯美的) 쾌락주의에 물들어 관능의 세계에 탐닉하다가 뉘우치고, 그런 행동의 결과가 추(醜)와 노쇠로 새겨진 그의 초상을 파기하려고 단검으로 찌르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찌르는 것이 되고 만다는 소설입니다. 그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신을 속임으로써 시작하여, 다른 사람을 속임으로써 끝맺는다. 그것이 이른바 로맨스다.>
사랑의 시작과 종말은 남,녀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당황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혼자라는 고독함을 느낄 때 사랑이 시작되고, 또다시 둘이 있는 불편한 고독함을 느끼면서 사랑이 끝나는 것이지요. 사랑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사랑의 기술이 아니라 사랑 받는 기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용봉산에서 기를 받고 왔습니다.
적어도 사랑했던 사람으로 인해 고독함을 느끼면서 사랑이 끝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