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현대의 정신생활에 등장하는 중요한 현상 하나가 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근대 역사적 삶의 전체적인 형성이 그 현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을 할 때 나오는 언어의 저음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이해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해보십시오. 그러면 이전에는 서로 완전히 다른 관게에 있던 유럽의 여러 민족들, 앞에서 언급된 시기에 완전히 다른 자극에 의해 휘둘리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복수의 민족들이 합쳐지는 일이 오늘날까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어떤 자극과 연관이 있는데, 과거로 올라가 중세나 고대의 국가 형성을 조사하면서 영혼생명에 그렇게 중요한 단계가 간과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자극은 완전히 잘못 해석됩니다.
다양한 관찰이 요구되는 주제들에 대해서는 저는 암시하는 말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주제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러한 암시를 통해 여러분이 심사숙고하셔서 결론을 내리시도록 맡기겠습니다. 이런 자극을 통해서 저는 정신과학과 삶의 통찰이나 이해 사이를 연결하기를, 다시 말해서 정신과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으로 의식적으로 개입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암시에 깔린 진정한 바탕을 언급한다면, 우리의 이 근대는 많은 옛것들을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주 카르마로 인해서 우리가 특히 아리만적으로 작용하는 환경 안에 놓이게 되고, 그래서 아리만의 영에서 나와 우리를 가로막은 장애물을 넘어 정신의 영역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영혼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면, 이를 위해서 오늘날 우리 영혼은 전에 가졌던 것과는 다른 것에서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도 모든 영역에서 이전과는 다른 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과도 연결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예술은 아리만적인 영향에 적게 노출된 영혼에게는 오늘날처럼 아리만적인 영향에 많이 노출된 영혼에게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런 예술로 가는 맨 첫걸음, 완전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첫걸음은 우리의 건축물에서도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정말로 영혼의 활동성에 호소하는 예술을 이 건물 안에 만들어내려고 했던 벙법은 현대 생활의 전반적인 이해 뿐 아니라 현대 생활의 ㅡ영적 이해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건축물에 관해 제가 몇 주 전에 언급한 심하게 평범한 비유를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건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옛 건축물처럼, 아니면 예스런 예술 작품처럼 보여야 할까요?”
오래된 예술 작품의 인상은 그 형태와 색에 의해 결정됩니다. 형태와 색이 인상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식적으로 그려본다면, 우리 눈에 이런 형태를 떠올리면 됩니다(스케치를 함). 형태의 내용물인 공간이 우리에게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색도 마찬가지 입니다. 면을 채우는 색이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건물을 들어 예술 작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바로 우리 건물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온 게 그 지극히 차찮은 비유입니다. 파이냄비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파이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한 비유 말입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형태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냄비가 텅 비어 있으면, 그런 사실은 그 물건이 무엇인가를 위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것으로 파이를 안든다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건물에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머무는 영혼이 이 건물이 가진 형태의 경계에 도달할 때 영혼 자신의 가장 깊은 근원에서 무엇을 체험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술 작품은 그 형태에 자극을 받습니다. 예술 작품은 그 형태의 구성을 통해서 영혼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압니다. 예술 작품은 말하자면 냄비에 구운 파이입니다. 건축된 것은 파이냄비입니다. 그러므로 건축물을 짓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