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인류가 우주 카르마에 따라 아리만의 영이 지배하는 현대를 겪으리라는 것이 미리 예고되지 않았다면, 그건 지구의 역사에서 가장 큰 불행이었을 것입니다. 삶은 흘러가며 언제나 진자처럼 반복되므로 절대로 잘못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삶은 흔들리는 진자 추처럼 이족 편과 저쪽 편에 따라 결정적으로 체험됩니다. 우리는 “아리만을 멀리하라!”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리만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기차도 지나가지 않고 공장도 없는 곳에서 가능한 자기 건강에 좋은 색채로 꾸민 작은 방 안에 계속 숨어서, 현대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열망한다고 해도, 아리만의 영을 그 사람의 영혼 안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길은 수 없이 많습니다. 그가 현대 생활을 벗어난다고 해도, 현대의 정신은 금새 그에게 다가갈 통로를 찾아냅니다.
인간의 발달을 그런 불행한 일로부터 어느 정도라도 보호해온 것은, 제가 이미 오래 전에 뮌헨의 연속 강연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것들이 현실에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헌데 모아야 하는데, 현대의 정신과학을 능동적으로 체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예술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술은 자연을 부수고 쪼아 원재료를 얻고, 그 다음 단게에서 그 재료를 다시 합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든 다음, 거기에 형상적으로라도 일종의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과거의 예술적 자극에 의해 생겨난 이 생명은, 뮌헨에서 언급한 것처럼, 루시퍼의 영성이 물질적인 것에 스며들도록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외형처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에 스며든 루시퍼의 영은 사람을 물질에서 정신으로 인도하는데, 다만 그런 인도는 물질적인 생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루시퍼는 언제나 물질적인 것을 피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정신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영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다른 진자운동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육화 상태에서 기술로 가득한 환경을 뚫고 나가야만, 아리만과의 연결점, 이전의 육화에서는 좀 더 예술적인 것 안에 숨어 있던 그 연결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쪽으로 삶의 진자가 움직이는 동안, 일종의 루시퍼적인 힘들에 대항하여, 어떤 균형을 맞추어 줄 현재의 아리만적인 힘을 내놓게 됩니다.
이제 정신과학이 특별히 의도하는 바는, 사람이 우주 카르마가 부여한 그것을 잠자고 꿈꾸듯이 헤쳐나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신과학을 이해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리만적이고 루시퍼적인 생명이 미치는 그 모든 영향을 잠자고 꿈꾸며 통과하는 것입니다.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그런 영향과 작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계속 살아가려면 자각해야 하고, 그러러면 정신과학이 필요합니다. 정신과학은 우리가 잠과 꿈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대신, 우리가 사는 환경을 인식하도록 해줍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정신과학으로 가동시켜 –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만 – 긴밀한 부분까지 실제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세밀한 부분은 자칫 간과되기 쉽습니다. 저의 강연 기록을 읽어보아도 긴밀한 것들이 간과된 게 보입니다. 때때로 저에게는 중요한 내용이 강연 기록에는 담겨있지 않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에서 두 가지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전에 저는 ‘정신과학은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해야 마땅하고 또는 원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지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말하는 사람이 완전히 자연스럽고 순진하게 사용하는 일종의 어법인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신과학은 정신적 생활의 진실을 다른 학문보다 덜 개인적으로 파악하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다른 학문의 어법이라면 “정신과학은 무엇무엇을 원한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지학은 “정신과학이 무엇무엇을 마땅히 원하고 또는 원해야 하는 것처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표현하는 것처럼”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표현해야 하는 것처럼”이라고 말합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