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학이 제공하는 도구들을 통해,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사람의 생활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그 생활을 관찰해서 영혼을 통찰할 수 있게 되면, 후기 아틀란티스 제4문화기 동안에는, 그리고 심지어 14, 15세기의 한가운데에 이르도록, 사람과 언어의 관계가 지금과는 달랐음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말할 때 정말로 저음을 냈습니다. 그런 사실을 요즘은 믿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만 말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같은 말을 해도 당시에는 한 옥타브 낮은 소리로 해서 뭔가 정신적인 소리가 같이 울렸습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언어로 달리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소리를 내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체험이 각각의 언어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리의 울림으로 체험하며, 그 울림에서 말의 의미를 압니다. 이와는 달리 엤날에는 언어가 가진 전체 요소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언어가 다른 것과는 상관없이 동일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언어를 듣는 그런 두 가지 체험을 가르는 경계는 15, 16세기였습니다. 당시 인류는언어가 가진 창의적인 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15,16,17세기에 인류에게 벌어진 특이한 충격을 이해하려면, 언어에서 저음이 약화되는 그 이상한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와 함께 인류에게서 뭔가가 사라졌으니까요. 경계에 해당하는 시기 전에는 사람의 영혼이 전쟁인지 평화인지 간에 뭔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그때는 사람의 영혼 안에는 언어의 저음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까지의 역사는 그 이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정신과학의 인도를 받아 오늘날과는 달랐던 중세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신적인 청각을 계발해야 합니다. ㄷ당시에 사람의 영혼은 당시 사람이 들을 수 있던 것들을 완전히 달리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류에게 일어난 일의 예로 십자군 원정을 들겠습니다. 중세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의 모습은 언어의 그 정신적-영적 저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중유럽과 서유럽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십자군 원정을 선언한) 클레르몽 공의회의 “하느님이 원하신다.”라는 (교황의) 선언에 중세 사람들처럼 감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그 말에 깊이 들어가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