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승용차 한 대로 5명이 오붓하게 출발합니다. 흉허물 없는 친구와 지인들이 한 차에 탄 것입니다.
운전은 약수가 하고, 앞자리 조수석에는 여유님이 앉고, 뒷자리 가운데 자리에는 산소가 앉았습니다.
차가 출발하자 산소는 앞 쪽으로 몸을 기울여 차창 밖 도로를 주시하면서 군대시절 ‘차량 선임 탑승자’ 임무를 시작합니다. 마음을 조리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이 풀어진 나는 평소의 산악회 원정산행 때 하지 못하던 짓을 합니다. 휴대전화 유투브 볼륨을 한껏 올리고는 맨 처음 곡으로 친구 산소가 좋아 한다는 Why me lord를 클릭합니다. 친구의 말대로 ‘또박, 또박‘ 부르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노래를 모두가 흥얼 흥얼 따라 부릅니다.
내 짚차를 탔을 때, 산소와 호암이 나무랐던 거친 내 운전습관보다 더 거친 솜씨로 차를 모는 약수의 차 안에서 산소는 점 점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모르는 척 계속 Oldies but goodies의 노래들을 틀어 댑니다. 산소는 이제 음악도 귀에 안들어 오나 봅니다. 계속 뒷자리에서 앞을 주시하며 약수를 향해 조용하나 단호한 어조로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약수가 누굽니까? 절대 남의 말 안듣는 수구꼴통(?) 이지요.
눈치 없이 음악을 크게 듣고 있는 나를 향해 산소가 에둘러 슬쩍 핀잔을 줍니다. “스테레오 설치는 안되나? 스테레오로 들어야 제 맛이지 !” 그래도 나는 못들은 척 합니다. 그런 나에게 이번에는 호암이 그 답게 무언으로 맞불을 놓습니다. 흘러간 대중가요 한 곡을 높은 볼륨으로 틀고 노래까지 흥얼댑니다.
드디어 산소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 야 이거 양쪽에서 사람을 죽이는구만” 그러면서 동시에 약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운 전 코칭을 합니다. “일차선으로 붙어, 아 그거 참, 왜 그렇게 급브레이크를 잡고 그려~, 저 앞 쪽을 미리 미리 봐~. . . . ” 그러거나 말거나 약수의 차는 그의 성격대로 급출발 급제동을 밥먹듯이 합니다.
슬그머니 음악을 끄고 내가 말했습니다. “자리 바꿀래? 가운데 자리 불편하잖어. 나랑 자리 바꿔 앉자구.” 들을 리가 없지요. “아냐. 아냐, 증말 괜찮어, 그리고 내가 길을 확인해 줘야 하기 때문에 여기 앉아야 돼.” 맞기는 합니다. 그가 길을 아니까요. 그러나 나는 걱정이 됩니다. 산소는 아마 스트레스 때문에 밥이 목구멍에 걸릴겁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약수의 곡예운전과, 길 선택 오류로 인해 구사일생으로 일행은 들머리에 도착했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약수의 반바지가 내 마음을 조금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대에 찬 마음으로 산길로 전진해 갑니다.
연인산은 참 멋진 산입니다. 초입의 임도부터 거목으로 자란 잣나무에 다닥다닥 열린 잣송이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갖가지 식물 잎새들을 잘도 구별하는 호암은 참 부러운 마음이 들게 합니다.
임도가 끝나고 산의 속길로 접어들 지점에서 일행은 점심을 합니다. 약속대로 각자의 먹을 것만 알아서 챙겨 왔으나, 그래도 나눌 음식들이 있습니다. 오손 도손 노닥거리며 식후의 담소를 끝내고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리도 산이 부드러울까요. 산세도 부드럽고, 발 밑의 흙도 마치 양탄자 위를 걷듯 몽글몽글, 폭신폭신합니다. 적당히 풍만한 여인의 팔을 잡았을 때 손에 느껴지는 감촉 같습니다.
비옥한 육산임을 입증하듯, 어른 한 아름 정도 굵기로 하늘을 찌르듯 촘촘히 자란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 굴참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끝없는 숲속을 달디 단 공기를 마시며 오릅니다. 다른 산행과 달리 슬로우 하게 걸으며, 주위를 감상하며, 하늘도 올려다 보고, 발 밑의 이끼도 살피며, 가녀린 들꽃도 허리 굽혀 쓰다듬으며 그렇게 휘적 휘적 산을 오릅니다. 철쭉 능선에는 2미터 이상씩 자란 철쭉, 대철쭉이 군락을 형성하고 방문자인 우리에게 슬쩍 길을 내주며 이파리로 얼굴을 애무해 줍니다.
풍만한 중년 여인의 속살을 어루만지듯, 성적 감흥이 일어나는 듯한 이 산은 너무 매혹적입니다. 너무 고혹적입니다.
산에서, 산 속을 걸으며, 산으로부터 성적 감흥을 느껴보기는 연인산이 처음입니다. 이 생각으로 인해 미친 놈 취급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나를 위한 변명입니다.
잊혀지지도 않는 그 이름 쥴리앙 쏘렐,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여인마저도 배신했던 그를 등장시켜 출세지상주의의 추한 인간상을 그려냈던 ‘적(赤)과 흑(黑)’을 쓴 스땅달이 그의 연애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열을 갖고 사랑해보지 않은 인간은 인생의 절반, 그것도 아름다운 쪽의 절반이 감추어져 있다.”
정상을 1.5킬로 남짓 남겨 놓고 뒤에 오르던 호암이 갑자기 증발해 버렸습니다. 오던 도중 안경을 어딘가에 빠뜨렸다하며 안경을 찾으려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합니다. 이 친구 또, 말도 없이요!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정상 오름을 포기하고 온길로 하산하려 출발할 즈음 호암이 안경을 찾아 들고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비가 쏟아지네요.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우의를 꺼내 입고, 우리는 되돌아 내려옵니다. 이 연인산은 오늘 우리의 정복을 사양하려 합니다. 한 번의 만남에 쉽게 몸을 내주는 헤픈 여인이 아님을 이 산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겁니다. 그 이유는 산도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주아주 고고한 수줍음으로 우리를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산의 생각을 존중하여 돌아서 내려 옵니다. 다음의 두 번 째 만남을 마음으로 약속하면서 !
산 밑까지 내려오는 동안, 연인산은 내내 소리 없는 이별의 눈물로 우의 속까지 우리를 흠뻑 적셔 주었습니다.
하산 도중에 이번에는 약수가 사라졌습니다. 또 그 놈의 성질머리가 그를 급하게 하산길로 내 몬 모양입니다. 산 밑에 거의 다 왔을 때 약수가 전화를 해 왔습니다. “나 지금 휴양림 쪽에 와 있는데 어디로 가야 우리 차 있는 데로 가는거야?”
합류해 만나 보니 다리에 찰과상을 입은 약수가 민망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맛있는 저녁 식탁은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유님이 마련했습니다. 마음으로 느껴오는 부담감은 여유님의 낮고 빠른 어조의 취지설명이 지워버렸습니다.
푸짐하기까지 한 식사자리였습니다.
우리 살루스캠프의 첫 산행이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꼭 같은 길을 가도 바보는 방황을 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