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역 1번 출구에는 장마철 반짝 개인 휴일을 산행으로 즐기려는 인파로 혼잡했습니다.
우리 일행들도 그 속에서 용케 서로를 만났습니다.
처음 보는 분도 만납니다. 고은 님, 이도령 님과 인사를 나눕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펭귄들이 긴 항해 끝에 돌아와서도 자기 배우자와 새끼를 용케 찾아내는 것을 보며 신기하다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 것을 그렇게 감탄했나 봅니다.
무덥고 습한 공기가 들머리 초입부터 온 몸을 끈끈하게 합니다. 마치 점액질을 코팅해 놓은 듯합니다. 체리 님의 목소리 외에는 일행들은 별 말도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발걸음만 헤며 올라갑니다. 간 혹 바람이 흐르는 곳에 이르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발걸음을 멈추어 쉽니다.
바윗등은 습기를 머금어 미끄럽습니다.
작년인가, 모 TV에서 남미 아마존 밀림 속의 원주민 생활을 취재해서 방영한 프로그램을 일부 시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습하고 더운 밀림 속에서는 그들처럼 실오라기 한줄도 걸치지 않은채 벗고 사는 것이 유일한 지혜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에 공감합니다.
정영님의 카메라 셔터가 부지런히 소리를 냅니다. 그렇죠, 사진 찍는 맛이라도 있어야죠.
여남은 일행의 조촐한 참가 일행이라서 그래도 다행이지만, 정영 님은 이 무덥고 습한 산행길에서조차 진지한 표정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며 촬영을 합니다. 참 진지하게 사는 분 같습니다.
저만치 정상의 태극기 깃대가 보이는 지역에서 점심을 합니다.
호암 님이 가져온 물김치가 대박을 칩니다. 블랙 님이 싸 온 핏자도 넉넉하게 나누어 집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음식은 남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점심 후 쉬는 시간이 있어서 편안한 하산 길로 접어듭니다.
거의 모든 산들의 북쪽 사면은 남쪽에 비해 가파릅니다. 가파른 길을 스틱에 의지해 내려가다 보면 깔딱 고개를 힘들게 오르는 사람들과 교차됩니다. 그럴 때면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내 땀샘조차 자극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하산길에 내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올라 올 때 체리 님이 자조하듯 한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만 올라가는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든 거야? 나만 힘들어 하는 것 같아아~.”
아니죠 누구나 힘들죠. 다만 참을 뿐이죠. 정상에서의 성취감과 함께 이 길, 하산길에서의 뿌듯한 즐거움을 생각하며 참는 거죠.
우리 삶도 그렇죠. 젊어서 겪는 고통은 삶의 목표를 위해 참고 인내하는 것이고, 낮동안의 힘든 고역은 밤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참는 것이죠.
드디어 계곡 물소리를 따라 내려갑니다.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습니다. 계곡물은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물에 담근 손이 시립니다. 등산양말을 벗어 내치고 물속에 들어 갔던 일행들이 발이 시리다며 놀라 뛰쳐 나옵니다. 머리를 물에 씻고, 심지어 옷 입은 채로 등 멱을 감는 일행도 있습니다. 저 오묘한 인간 신체의 반사작용이라니 !
이게 과연 어떤 작용일까요? 신의 창조일까요? 아니면 진화의 결과일까요?
하산 후의 뒤풀이 음식집은 블랙 님이 안내했습니다. 옻을 넣은 오리탕입니다. 음식 맛보다 산천님과 체리 님의 만담이 좌중을 흥겹게 합니다.
지나고 돌아보면 모든 게 추억입니다. 심지어 실패의 경험조차도.
오늘의 약간 우울한 산행도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는 추억으로 변합니다. 비단 산소 님이 쏜 노래방 코스의 작용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 제목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살인을 저지른 자가 미궁에 빠진 자기 사건을 보며 추억을 한다면 어떤 추억일까요?
로마를 불태운 네로가 했듯이 시를 읊을까요?
햇빛은 생명체의 생명 자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