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인데도 날씨는 봄입니다.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가족과 함께 참가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밝고 따뜻한 분위기입니다.
국화님이 부군과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부군은 애처가 타입의 참 온화하고 성실한 인상입니다. 소개를 하며 두 분 모두 의도적인 과묵함을 보이십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짐작이 됩니다.
불로님이 사위를 대동하셨습니다. 사위가 참 차분한 느낌입니다. 눈이 맑아 보입니다. 불로님도 딸 바보인가 봅니다. 그리고 산행에 장인을 따라나선 사위는 기네스 북 등재감입니다. 은수님이 부군과 아들과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부군은 자신의 삶과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 당당함을 한껏 드러내십니다. 아들은 낯선 환경에 어색해 하면서도 수용적인 모습의 준수한 청년입니다. 은수님은 자신의 삶과 가족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구동성으로 와~ 하고 환호성을 터뜨립니다.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첫 주말의 의미는 모든 산행인들에게 동일하다는 듯 산길이 몹시 혼잡합니다. 가끔씩 산행 길에서 은수님 가족들과 교차됩니다. 아버지가 뒤에 처져 따르는 아들을 눈에 넣듯 챙깁니다. 아들 사랑이 절절하십니다.
“힘들어?” 아들이 말 대신 손사래를 칩니다. 조금 오르다가 다시 아들을 보살핍니다.
“너 장갑 가져왔어?” 아들이 다시 말 대신 손사래를 칩니다.
“장갑이 있어야 되는데,… 내꺼 줄까?” 아들이 또 다시 말 대신 손사래를 칩니다. 아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을 오르며 아버지가 혼잣말을 합니다. “등산은 자주 안하면 힘 드는데,… 쟤가 매일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니 … 힘들지….”
듣는 사람 마음에도 잔잔한 떨림이 옵니다.
‘실러’의 말처럼 우리들을 부자지간으로 맺어주는 것은 단지 혈육관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애정입니다. 참 좋은 부자지간입니다.
산행 막바지에 은수님이 누군가에게 묻습니다. “중간에 빨리 내려가는 길은 어떻게 되지요? 우리 아들한테는 오늘 일정이 너무 길어서…쟤가 너무 힘들어서…”
아버지는 자식을 자식으로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자신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이 더 진한 것인가 봅니다.
북한산의 암봉들은 볼 때마다 그 형상이나 자태가 결코 우연의 자연현상이 아닌 신의 조형작품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붙여져 내려온 이름들은 족두리 봉, 사모바위…처럼 매우 물상적입니다. 그런 물상적이고 시각적인 이름들이 붙여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러기에는 산세의 이미지가 너무 신비스럽습니다. 그렇기에 가끔씩 그 신비한 아름다움에 비해 이름들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치 선녀같은 여인에게 ‘언년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른다거나, 도골선풍의 호남자에게 ‘마당쇠’라고 이름지어 부른다면 느껴질 것 같은 불경스러운 생경함이 들곤 합니다. 나를 불러 주는 이름이 나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문님이 오늘도 배낭에 더하여 카메라 장비 가방을 앞에 메고 다니시며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오르내려야만 합니다. 가끔씩 다리에 쥐가 나신다는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수호천사님이 선언을 합니다 “내가 오늘은 일일 고양이 할낍니더.”
아둔한 내가 미쳐 감을 못잡았습니다. 고양이 이미지는 그분과 잘 매칭이 안되는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묻습니다. “네? 고양이요? ” 그분이 대답합니다. “내가 오늘 고양이가 돼서 운무님한테 오는 쥐를 다 잡아 묵을라꼬요.”
정말 이분은 문학적 은유법의 고수이십니다. 시인입니다.
오늘 산행 내내 우문님은 그분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산 길 막바지에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쥐를 못 잡으셨나 보네요? 입술 색깔이 그대로네요?” 우문님이 대신 대답합니다. “고양이가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으니 무서워서 쥐가 아예 오지도 못했나 봐요.”
아, 그러면 그렇껬지요. 고양이가 보통 고양이인가요? 어머 어마한 몸집의 고양이 아닙니까? 역시 닉네임을 잘 지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