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 단풍의 쓸쓸한 아름다움을 품은 대둔산의 아기자기한 산세 속에 파묻혔던 10여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며 동행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출발하는 이른 아침 가을비가 찔끔거렸어도 오후에는 개일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에 배팅하기로 맘먹고, 미리 허락을 구한대로 1년간 동료로 지낼 독일인 젊은 여학생과 동반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기상정보는 역시나 부정확했고, 짙은 운무, 혼잡한 인파, 무질서한 소란스러움에 섞인 산행은 애초의 내 참여 동기를 포기해야 된다는 우울함과 더불어 진행 됐습니다. 더구나 사진자료까지 동원하여 외국의 젊은 여학생을 들뜨게 하고 말았던 나의 대둔산 소개가 실증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과 민망함도 더해져, 내 마음은 대둔산 전체를 휘감고 있는 두껍고 무거운 안개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몇 구비를 돌고 기어서 오른 해발 880미터 산 정상, 계룡산을 포함하여 그만 그만한 충청도 지방의 여늬 산들처럼 경외감보다는 오히려 수더분하여 오르고 난 후 그다지 큰 등반 성취감은 보상되지 않는 반면, 동네 골목 수퍼마켓 아저씨 같은 친근함을 주는 그런 산 정상입니다. 대 여섯 길 바닷물 속 풍경처럼, 바로 눈앞의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희뿌옇게만 보이는 그곳에서 서성일 때, 짙은 회색의 안개를 배경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피사체 하나, 그야말로 산꼭대기 모진 풍상을 겪어 낸듯한 키 작은 단풍나무 한 그이루가 눈에 잡혔습니다. 그 나무는 마치 회색의 백스크린 앞에서 촬영을 대기하고 있는 인물처럼, 오직 그 하나만 그렇게도 선명하게 눈에 잡혔습니다.
무형 무채색의 짙은 배경을 뒤로하고 비로소 드러난 평범했었을 한 대상의 존재적 엄정함, 그에게서 전해오는 생명에너지의 경외, 4차원적 디테일의 신비함, 줄기와 가지의 선과 형체의 미세한 흐름, 물감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빛과 색.
두꺼운 안개 속의 대둔산은 그 정상에 서있는 이승의 미미한 여행자에게,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에 대하여. 잡다한 배경요소들을 제거 할 때에야, 또는 그것이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온전히 드러나는 것들에 대하여 짧은 시간 깊게 몰입할 기회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 먹먹한 안개가 오히려 마음을 반짝이게 하였습니다.
바람까지 곁들여진 하산길의 발걸음이 느렷던 것은 그 느낌들이 발자국마다 새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녕 대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