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직장에 출근할 일이 없으니 우선은 하루 일과부터 달라진다. 생활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 시간의 흐름이 느리로, 세상이 느리게 돌아간다. 처음에는 그 점이 견디기 힘들게 낯설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자신이 마치 가족과 사회로 부터 버려진 무능력한 존재처럼 생각되어 웬만한 자긍심으로는 좌절감을 이겨내기 힘들어진다.
다른 한편, 은퇴생활을 하면서 변하는 것들 중 가장 큰 점은 아마도 세상과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일 게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은퇴 전에 못하고 미뤄 두었던 일들,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려고 노력하다보면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바빠진다. 읽고 싶었던 책들, 듣고 싶었던 음악들, 배우고 싶었던 악기연주, 전시회나 공연의 관람, 가보고 싶었던 여행, 등 등.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바쁜 일은 지나간 세월동안 겪었던 일들에 대한 반추에 하루가 짧아진다는 점이다. 은퇴자로서 지난 삶을 돌아보며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점은 내가 그동안 가족과 동료와 이웃과 그리고 사회에 대해 잘한것은 거의 없고 잘못한 것들만 너무 많다는 생각일 것이다. 꼭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것들, 하지 않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질렀던 것들에 대한 회한이 밀려들 때면 혼자 마음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 뜯기도 하며, 가슴을 치기도 한다.
한편, 그 회한 들의 틈새로 짬짬이 아름답기도 하고, 애닯기도 하고, 가슴 저려오는 추억이 봉긋봉긋 머리를 내밀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곧장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간 사실에 대한 슬픔으로 변환된다.
이제부터 이 은퇴자는 야외의 나무벤치에 앉아 지난간 긴 긴 세월에 대한 얘기들을 한 가지씩 꺼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