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대 생활이라고 일컫는 것이 인류의 발달과정에 늘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후기 아틀란티스 제5문화기가 시작된 뒤입니다. 후기 아틀란티스 제5문화기의 시작과 함께 이 현대 생활도 시작된 셈입니다. 외적인 정신문명은 이 현대 생활의 등장에 대해 어떻게 말하나요? 잘 아시다시피, 현대의 정신문화는 이 현대 생활과 함께 이루어 놓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와 중세 전 시기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제대로 관찰하는 능력을 계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자연관찰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이 나오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자연과학이 나왔다.” 근대를 이렇게 말하는 경우에는 후기 아틀란티스 문화기의 시작과 맞아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옛날의 자연관찰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추상적인 법칙성을 바탕으로 자연을 관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자연과학도 흔히 말하는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자연법칙을 알게 되고 그 자연법칙에 따라 물질을 기계로 만든 것입니다. 그 기계를 자연과 생활에 사용하여 현대 생활을 기계에 의존하도록 꾸며 기술이 지배하는 환경을 만든 것이, 바로 우리를 둘러싼 현대 생활과 그로써 만들어지는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근대야말로 진정한 자연과학의 토대를 놓았고 그와 함께 자연과 그 힘들을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아주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리만의 언어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리만의 언어로 말했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그 아리만의 언어를 참된 언어로 옮겨보아야 합니다. 참된 언어를 통해 다시 정신과학을 배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외적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의미만 부여된 단어들이 아니라 우주를 전체로, 즉 그 본질과 정신생명을 포함하여 관찰할 때 부여되는 단어들을 통해서 정신과학을 배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술을 만들어 낼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아주 표면적으로만 생각해 봅시다. 그 경우의 작업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단계는 자연의 연결고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바위를 부수어 돌멩이를 만들고, 숲을 망가뜨려 목재를 얻습니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자연의 연결고리를 부수고 망가뜨려 자원을 얻어내는 겁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렇게 자연을 망가뜨려 만드는 것이죠. 우리가 겉으로만 보면, 일은 이렇게 두 단계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사안을 내면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내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짓부수면, 제일 먼저 광물로서의 자연을 부수면, 이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광물은 일종의 쾌적감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런 쾌적감은 그 광물 속에 정신적인 요소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런 것을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일어나는 데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과정에서 자연을 유지해 주는 원소영들, 즉 이것도 정신계의 발전된 위계의 영역에 속해 있는데, 그 존재들을 자연으로부터 추방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에는 원소영의 존재가 있습니다. 자연을 짓부수면서 우리는 자연의 영들을 짓눌러 정신계의 영역에서 쫒아냅니다. 이 과정은 첫 번째 단계와 지속적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자연을 부수고 짓뭉갬으로써 그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정신들을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이 자연의 영들을 야훼 신들에 속하는 영역에서 자기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날갯짓을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쫒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첫 번째 단계를 ‘자연 영들의 추방’이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자연을 갈갈이 찢고 괴롭혀 얻어낸 자원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에 따라, 하나 또는 일련의 기계를 형성하고, 우리가 형태를 만들어 다시 그 안에 어떤 정신적인 본질을 집어넣어 새로운 구조물을 만드는 것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