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런 세밀한 부분에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대강 스쳐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정신과학의 가장 내면에 있는 것까지가 사람의 영혼이 가진 힘들을 파악하고 있어서 그것들을 다른 힘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함을 믿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삶의 외면에서 시작하여 정신과학에 접근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학문이 외면적으로 발달해온 결과로 생긴 확실한 징후에서 인지하고 추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예에서 한 가지만 보겠습니다. 현대의 종교학, 즉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학이나 계명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얻어 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기도’의 각 구절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추적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구절은 여기에, 다른 구절은 저기에, 하는 식으로 이미 다른 문서에 있던 것들이다.” 들어보면 그럴 듯한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사적인 관점 즉 영적이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골고타의 신비’에 접근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새로운 연관관계 안에 있음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구절들이 이미 전부터 어딘가에 있었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들에 새로운 뉘앙스를 부여하는 주변 환경을 확인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구약과 신양성서에는 그 새로운 뉘앙스가 등장합니다 골고타의 신비를 통해서 드러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주 세밀한 내용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구절들, 그리고 각 구절 사이의 맥락들은 동일하게 유지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역관관계가 명암을 달리하고 어감이 달라지는 종류와 방법은 다르며, 바로 그런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엄청난 사실 하나는, 언어의 전체 발달 체계에서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이르도록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자아(나)라는 개념과 표상은 나중에, 즉 골고타 신비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시대와는 다르게 조직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자아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 달라지는데, 이는 언어의 구성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를 가리키는 요소는 많은 언어에서 동사 안에 숨겨져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그것이 동사와 분리된 상태로 배치되어 발음되는 경우 등과는 완전히 다른 뜻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사안은, 우리가 정신과학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신적-영혼적-신체적 유기체에영향을 미치는 것을 자각이 있는 상태에서 통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한 것처럼, 사람과 기술로 가득찬 환경 사이의 관계는 물론, 막 생겨난 발전의 초기 단계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규모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약 400년 전입니다 . 그리고 그토롤 자부심 넘치는 19세기에 들어 우리 생활의 아리만화는 커다란 진전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리만화를 향한 인류의 발전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미래입니다. 지금까지 대략 400년 동안 우리는 그런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변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변화가 어느정도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소외된 삶으로 인해 진정한 자연 정신들과는 연결점이 거의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저는 상징적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보리와 귀리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사람의 발달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보리와 귀리를 구분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여러 가지 초목은 보리와 귀리보다는 쉬우니까 구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종류와 다른 종류 씨앗을 서로 구별하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들, 아니 도시에서 태어난 경우는 보통 그런 것들은 구분할 수 없습니다.<계속>